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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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5. 12. 1. 15:17

 

 

 

 

겨울 아침, 정선旌善 

/ 윤제림

 

얼굴 봤으면 됐지 뭐, 또 올게.

그때는 한 사나흘 자고 갈게.

시계를 가리키며 공연히 잰걸음으로 돌아나와서,

역전다방 창가에 붙어앉아 내려다보는 정거장 마당.

신발가게 주인은 귀마개 위로 장갑 낀 손을 붙이고 섰고,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검은 삽사리와

누렁이가 눈 위에서 한바탕 붙어 있다.

지금 막 계단을 내려간 다방 처녀는 맨종아리가

더 안쓰러운데, 연신 코트 깃만 고쳐 세우며

이발소 앞을 걸어가고 있다.

이발소 하얀 수건들이 철사줄에 붙어 있다.

정거장 마당 깨랑 콩이랑 말린 나물이랑

꼭 한 움큼씩 벌려놓은 여자는 두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어서 기차 시간이 돼서 더러 팔렸으면 좋겠다.

아니,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 '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2001

 

 

 

 

 

 

 

 

겨울 저녁, 서산에서 

/ 황동규

어른대던 사람들 둑에서 내려가고

한참 만에 사람 하나가 새로 올라간다.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던 금 천천히 풀어지고

언제부터인가 눈이 자꾸

안 보이는 것을 찾고 있다.

바티칸이 감추어두었다 이따금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 얼굴의 눈이

열심히 미켈란젤로를 찾는 그런 겨울 저녁,

눈 친 벌판을 둘러보는 동박새의 눈,

한 점 두 점 눈발이 시작되다 빗방울이 되어 날기도 하는

그런 저녁,

가창오리 몇 마리 날아올라 허공을 휘돌다 사라진다.

김용배의 설장구, 그 시원한 끄트머리!

빗방울 몇이 얼굴을 따갑게 때린다.

손사래를 친다.

지금 이곳이 지구 속인가 밖인가?

생각하다 말고 바람이 불고 있다.

-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마지막 비 

/ 문태준

이 새벽에 내리는 비가 올해 마지막 비가 되겠지

얘기 좀 더 해봐요, 비여, 얘기 좀 더 해봐요, 저음(低音)의 비여,

비는 하귤나무에 은목서에 양하 마른 잎에 층계를 오르내리며 내리고

일어나려는 세계를 잠 속으로 나른하게 더 갈앉히네

이 비 그치면 소식이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나는 홀로 새벽을 맞겠지

먼 데 있는 사람아, 사람아,

간혹 눈은 내려 쌓여 나의 고립과 검은 땅과 불 꺼진 뿌리와 내 푸른 기억을 덮겠지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 몇 십년 전 이곳엔 배추가 귀했다.

당시 독일 수상 이름이 배추(Kohl) 였던 탓인지 

배추류들이 딱히 이유 없이도 공분을 사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좋아진 요즘은 어지간한 야채가게에도 배추가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고 김치가 궁금하다는 지인들도 있고 해서

서너 포기 제대로 절여 김장을 했다. 

맛만이라도 보라고 반포기씩 두루 나누다 보니,

서너포기씩 하는 김장만 벌써 3 번째다.

결국 그 자랑을 하려고 배추얘기부터 장황했다. 

 

......  핸드폰의 행방이 묘연하다.

쓸 만한 사진이 더 있을 터이지만 자취를 감춘 핸드폰 속에 들었다.

요즘 AI가 꿈에까지 등장하는데, 

기회를 노리던 핸드폰과 결탁을 한 것은 아닌지.

아주 멀리,

다른 우주로 망명을 한 게 아닐까 

 

...... 정선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싶은 겨울아침의 여러 변주에 심장이 아리다. 

예닐곱 번 넘게 읽고 있는데 '삼포가는 길'이 겹친다.

여주인공 이름이 '백화'였지 싶다. 

 

...... 댓가없이 가져온 시들, 써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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