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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노래하는 모자 본문
노래하는 모자
/반칠환
그는 창고를 짓지 않았을 때에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 나를 들여 양치기로 삼았다. 그는 내가 노래할 때마다 모자를 하나씩 씌워준다. 나는 점점 높아진다. 노래를 들은 양들은 하나씩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 노래하는 나는 입이 있지만, 반짝이는 별들은 항문조차 없다. 노래를 할 때마다 모자는 높아지고 나는 점점 납작해진다. 나는 그의 창고에 매혹되어 종종 그를 잊지만, 그는 때마다 나를 불러 찬미하라 한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가 모든 것이 부족한 나를 찾는다. 어디에나 있어도 안 보이는 그가, 어디에 숨어도 보이는 나를 찾는다. 처음엔 목이 쉬도록 노래 불렀지만 이제는 허밍으로 노래한다. 절창으로 부른다고 그의 영광이 높아지고, 음치로 부른다고 광영이 낮아질 리 없기 때문이다. 늘지도 줄지도 않는 잔칫상에서 그가 왼손에 든 것을 가져다 오른손에 쥐어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제는 그의 기쁨을 노래했지만 오늘은 나의 슬픔을 노래한다. 마지막 양이 사라지고 모자가 발목을 덮으면 나도 별이 되리라.
ㅡ 공정한시인의사회 2021, 6월호
.......... 위의 시와 아래 그림에서의 '모자'는 상관이 없다.
보기에 참 불편한 그림,
엄마 마리아에게 맞은 어린 예수의 엉덩이가 벌겋고
머리에 썼던 관까지 오른 쪽 아래 떨어져 나뒹군다.
그림에는 3명의 목격자가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못 본 척 먼산을 보고 또 한 명은 아예 눈을 감고
오직 단 한 사람 만이 이 광경을 직시한다.
*
Die Jungfrau züchtigt das Jesuskind vor drei Zeugen: André Breton, Paul Éluard und dem Maler,
Max Ernst 1926
-
아침에 이 시를 읽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답글
그러다가 오후에 아주 쓸쓸한 곳으로 와서 이 댓글을 씁니다.
세상에 이런 시가 있으니 무턱대고 시인이 될 필요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이런 시가 있는 세상이 썩 괜찮다는 생각도 합니다.
충격 그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고맙습니다.
'공정한 시인의 사회'?
오죽하면 이 이름을 붙였겠나 싶고, 그래도 그렇지 싶기도 했습니다.
공정이 실현되면 그다음엔 또 뭘 하게 되는지 그것도 아득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저도 젊었던 시절에 개구장이들을 좀 패주고 하다가 체벌혐오주의자가 되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애들은 좀 맞으며 커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체벌을 금지하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으니
그대로라면 세상은 망하는 거죠, 뭐.... 교육이 없는 세상이 될 테니까요. ㅎ~-
숲지기2021.06.04 13:00
'공정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 봅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공정함'은 다르고 또 변천하여서
우리의 발전한 사회와 어느 섬나라(섬나라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의 부족 씨족 사회의 가치가 다르지 싶습니다.
또한 시 쓰는 무리들에게 공정함이란, 다른 측면에서는 그들이 써낸 시 안에서의 공정함도 있을 것이고요.
써낸 작가들끼리, 그들 작품의 비교 공정함은 또 어떻고요.
오늘은 쓰나마나한 말을 교장선생님께만 벌써 두번 째 나열합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머릿속은 지난 달 말에 황망히 가버린 친구를 위해 계획하는 장례(축제)식 내용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공정성'이 세상에 있을까요?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만든 막연한 단어가 아닐까요?
독일어로는 게레흐틱카이트Gerechtigkeit, 우리말의 정당성, 즉 인권에서부터 파생한 단어이며 그 정의를 매우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게 서술했습니다.
부모에게 양육의 의무는 주면서
그 방법을 너무도 제한하죠.
선생님들의 애로사항이 많겠다 싶습니다.
단체로 종아리를 맞았을 때 나름 섬세한 손목을 가지셨던 선생님께서 손목통증을 호소하실 때 어찌나 고소하던지요.
그때 위로 한마디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
잘 하셨네요.
때린 사람을 왜 위로하겠습니까?
무슨 공주병에라도 걸렸나, 사람을 떄려놓고 손목이 아프다니, 그건 공정하지가 않은 건데 그런 것조차 몰랐다니...
까짓거 키워놓으면 그만이죠.
낳았으니까 책임을 져야 하는 거고요.
다 키워주었는데 딴소리 하는 자식이 문제죠.
훌훌 떠나가면 좋은 자식인 거죠. ㅎ~
전 잘난 체하는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거물이 되어서 여자들 알기를 우습게 알고 그렇게 하는 걸 무슨 특권인양 음담패설을 넘어서 해선 안 될 짓까지 했다는...
여자들 중에도 있을걸요.
그런 인간이 있으니까 저런 이름까지 생긴 건데 그래도 시인은 그런 용어 외면하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생각 자체가 싫은 건데 그런 생각은 우리 같은 인간에게 맡기고 시인은 시인들대로..... 에이, 그만둡시다.
저도 한심하네요. -
숲지기2021.06.06 00:37
하필 교장선생님께 이런 저의 과거를 말씀드렸을까요,
이미 깨진 독입니다요 하하
전 학급이 맞았지만 아팠던 기억은 한톨도 없습니다.
선생님께선 반 아이들 절반 쯤에게 매질을 하신 후 '손목이 아파서 이 것도 못 할 짓이다'라고 혼잣말차럼 되뇌셨고요.
그분의 교육방법이었고, 저는 지금까지도 불만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래에 쓰신, '~알기를 우습게 알고 '하는 분들과 그 분위기에 생각을 많이 합니다.
손가락으로 몇몇을 짚어보기도 했는데
저도 그만두기로 합니다.
시대적 정서가 많이 변한 듯 합니다.
참 다행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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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함” 이라는 기준이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걸까요?
답글
삶에 공정함 있다고 전 믿지 않아요. 신의 존재도 불분명 하구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셔서 만드신 우리 인간들..
세상에 태어나 1~2년도 안된 아가가 못된 질병에 죽을때나
너무나 힘들게 살아온 인생을 힘들게 마감하는 사람들을 볼때
공정함이란 기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초딩 5학년때 처음으로 반 전체 급우들이 보는 앞에서
제 담임 선생님 “김 창식” 이란분이 제 따귀를 너무나 아프게 때렸어요
(제 짝과 말다툼 했다는 이유로../ 그 친구가 시험지를 서로돌려 점수를 메기는중에 제것을
죄다 틀린거로 해놨더랬지요ㅠㅠ)태어나서 첨으로 따귀를 그때 맞아봤어요. ㅠㅠ
지금까지 어려서 선생님들의 성함을 기억 못하는데 딱 두분만 생각나요.
다른 한분은 중3때 “권 길중” 선생님 엄마 암 수술후 동생들 아침밥 해놓고
학교에 다녔는데 자주 지각을 했더랬지요, 그날도지각 몇분전 복도에서 뛰어 가다가 담임 선생님께딱걸려서
넘 무서웠는데 선생님이 “다쳐 천천히 가거라”….
지금도 너무나 뵙고 싶은 “권 길중 선생님!”-
숲지기2021.06.07 15:25
오,,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제 말은 얼굴이 아닌 마음이 말입니다.
여전히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계실 정도이시니.......
제가 호~ 해 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권길중선생님, 존경합니다.
그렇게 따뜻한 한마디를 마치 준비라고 해 두신 듯 해주실 수 있는 분은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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