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아침 10시 모닝소주, 부산 시외버스 정류장 본문

내 발 닿았던 곳

아침 10시 모닝소주, 부산 시외버스 정류장

숲 지기 2024. 3. 17. 06:24

 

고국에 다녀온 지 한주가 지났다.

목소리에 여전히 울음이 섞여서

꼭 해야할 말 외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있다.

 

 

제주 함덕해변에 쓴 '흑림에 살으리랏다'

 

 

 

제주에 짐을 풀고 육지로의 비행했던 2월말 어느 날이었다.

국제면허 교환을 미처 하지 않아서 버스나 택시로만 이동해야 하는 첫 도전의 날,

제주출발 후 김해공항을 거쳐 부산 시외버스정류장 도착, 버스표를 끊고나니 9시를 갓 넘긴 10시 쯤이었다.

몇 십년 만의 귀향이므로 요동치는 내 감정과는 대조적으로

정류장은 한산했고, 멀뚱멀뚱 승차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사람은 더구나 나 말곤 없었다.

목적지와 승차시간 승차시간을 확인하니 내가 탈 버스 승차구 바로 앞에 용케 벤치가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커피를 쏟아놓았다.

마시려던 순간 버스가 왔을까,뜨거운 커피를 엉겁결에 대합실 의자와 나눠 마셨나.

커핏물이 흥근한 자리에 아주 잠시 서 있는데 

검은 외투 차림의 아저씨가 자신의 옷소매로 커피를 닦기 시작하였다.

먼 대륙에서 온 숲지기라는 것을 알 턱이 없을텐데,

이해불가한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머릿속이 순간 복잡했다.

그때였다, 한 사내가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는데, 

(아마도 화장실에서 휴지를 급구했었던 듯) 한 손에는 흰 휴지가 들려 있었다.

감사의 말을 두어 번 하고 커피를 닦아낸 의자에 앉았다.

두터운 외투를 벗고 짐가방도 발 앞에 놓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종이컵을 내밀었는데 자신의 옷소매로 커피를 닦던 그였다.

맞은 편에 그들이 앉아 있구나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

그러니까 이 두 분은 주거니 받거니, 모닝소주를 즐기던 중이었다!

별안간 내 앞의 소줏잔에 깜짝 놀랐었고

내 표정이 들킬까봐 태연한 척을 하느라 부자연스레 많이 웃었다.

또  여러 번 고맙습니다를 내가 연발할 때

'아 이사람아' 하며,좀 전에 휴지를 가져왔던 일행이 또 어디선가로 사라지더니 종이컵(생수용)을 가져왔다.

갈수록 난해함이 더해진다고 느껴질 때

정신을 차려 보니 내 한 손에 소주가 가득한 종이컵 잔이,

다른 한 손엔 동그랗게 말린 짭짤한 과자 몇 조각이 들려있었다.

 

 

김해공항주변, 하늘에서 본 풍경

 

 

그 사이 무슨 대화인가를 그들과 나눴지 싶다.

기억나는 것은 그러나 소줏잔을 들었던 손의 어색한 무게감과 특유의 소주냄새 뿐이다.

소백산 아래까지 가야했던 나에 비해 그들이 타고 갈 버스가 먼저 왔다.

들고 있던 소주를 드디어 바닥에 내려놓아도 좋을 떄,

묘한 해방감과 안도감이 일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마치 도깨비 장난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자신들의 버스로 떠났던 일행 중 한 사람이 다시 왔다.

휴지와 종이컵을 공수했던 몸 빠른 사나이 그였다. 

'버스를 타고 어딜 지나서 영천 어디 쯤 무슨 표시, 그 곳에서 어느 방향으로 보이는 마을,

몇 번째 어찌어찌 생긴 집'을 꼭 보란다, 그가 사는 집이며 지금 그 곳으로 가고 있다고.

그의 말 끝에 

'아 무슨 모퉁이에 표시....요? '라고 대꾸하는 중에 그가 가벼렸다.

거의 바람의 속력으로 그가 버스를 타러 사라진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도, 그들이 커피를 닦아준 그 자리에 나는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

 

(이 글을 읽을 턱이 없겠지만,

영천 어느 마을의 두분께 감사드린다. )

 

 

봄비가 내리는 중 제주의 동백꽃

 

'내 발 닿았던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맘대로 한라산  (12) 2024.03.24
제주, 초번화가에서 길 잃기  (14) 2024.03.22
내가 만난 제주  (12) 2024.03.19
피렌체, 종일 걸려 찾아든 곳  (16) 2023.12.1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