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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림살이 /동화·신화·재생

텔레비전이 돌아가셨다

숲 지기 2020. 3. 17. 08:57

 

 

 

 

 

 

 

텔레비전이 돌아가셨다

/정병근

 

텔레비전이 꺼졌다
화면이 부르르 떨리더니 몇 번 번쩍거리다가
한 점으로 작아지면서 소멸했다
별빛이 사라지듯 이생의 빛을 거두었다
적색거성처럼 화면은 며칠 전부터 불그스름했다
옆구리와 가슴을 쿵쿵 치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텔레비전은 한 번 감은 눈을 더는 뜨지 않았다
플러그를 뽑았다가 다시 켜도 허사였다
오래 준비해 온 듯 텔레비전은 단호하고 고요했다
결혼하면서부터 함께했으니 근 25년,
나는 그렇게 텔레비전을 임종했다
집안의 큰 어른이 돌아가신 듯 마음이 허망했다
무릎을 세우고 텔레비전을 보던 고향 집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 무슨 말끝이었나
그때 나는 아버지와 텔레비전을 겹친 시 한 편을 썼었다
갑작스런 고요가 귀에 맴돌아 나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내에게 알릴까…… 바쁘다고 짜증내겠지
처사께서 졸卒하셨다고 부고를 띄울까…… 다들 웃겠지
텔레비전은 우리 집의 어른이었다
거실의 제일 상석에 앉아 세상의 영욕을 비추며
가뭇없는 우리의 눈을 지그시 보아주었다
평평한 당구대의 알레고리를 간직한 채 평면으로 돌아가셨다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주검을 방치한 채 몇 달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뿔뿔이 눈을 돌렸다
밥상은 고요했고 집 안은 푹 꺼진 동굴처럼 어둑했다
나는 아내가 텔레비전을 들이자고 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아내도 나 같은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 파란편지2020.03.17 06:22 신고

    텔레비전 고장 난 걸 이렇게 쓴 시(글)는 처음 보았습니다.
    저 시인은 시종일관 비장했지만 저는 이 양반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 싶을 뿐이었고,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아직 구입 의사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것 역시 저로서는 하나도 답답할 일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텔레비전이 고장 나서
    가로로 세로로 죽 죽 선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그 현상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짐해져서
    이러다간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으로
    전자제품 가게에 진열된 상품을 보고 100만원 정도의 텔레비전 구입은 포기하고
    15만원짜리 모니터를 구입해서 얼른 교체했습니다.
    제가 저 시인보다는 조치가 빠르고 그래서
    제 아내는 조금의 애로도 느끼지 않게 해주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텔레비전이 고장 난 걸 그대로 두더라도
    이런 시 한 편 쓸 수 있으면 저도 시인처럼 했을 것입니다.
    정병근 시인이 부럽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0.03.17 23:20

      우리 인간사의 어느 특정 부분이 연상되도록,
      시를 쭈욱 그렇게 썼습니다.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 싶을 뿐'이셨다지만
      교장선생님께선 텔레비젼이 고장나자마자 바로 교체했다 하셨습니다.
      보나마나, 사모님께서는 매우 만족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요 ㅎㅎ

      그러니까요, 세상엔 고장난 것을 고수하며 시를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것으로 재빨리 바꾸고 사랑받는 사람이 있죠.
      혹시 시를 쓴 정병근 시인은 교장선생님을 부러워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시를 읽던 날 문덕수님의 부고를 메일로 받았습니다.
      요즘 이런 시 읽는 게 참 그렇습니다 ㅠㅠ

  • 파란편지2020.03.17 06:24 신고

    저 그림 누가 그린 것입니까?
    참 재미있고 예쁜 그림입니다.

    답글
    • 숲지기2020.03.17 23:25

      시와 맞는 그림을 찾다가 만났는데,
      제가 좀 수정했습니다.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텔레비전 교육'이라는 것이고요, 아이들과 텔레비전 사이에
      포악한 도구들이 놓여져있었습니다.
      칼 방망이 도끼 등등요. 근데 지우개로 지웠습니다.

  • 열무김치2020.03.17 08:13 신고

    배불뚝이 아나로그 텔레비젼을 여전히 보고있는 거래처가 있습니다.
    "사장님, 요즘 쓸만 한거 20만원 안팎이면 산다니까요.. 거, 버리고 하나 들여놓지 그래요."
    "아니야, 저 텔레비젼은 그냥 테레비가 아니지.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다 알고 있는 역사창고지."
    "무슨 시를 쓰시는 것 같네요?"

    참으로 기묘한 것은 이제 망가질때도 됐는데도 여전히 잘 나오고 있으니 그 점주가 그런말을 할만도 합니다.
    비록 무생물이지만 그간 쌓인 정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글이 아주 묘한 느낌을 주네요.

    답글
    • 숲지기2020.03.17 23:40

      글에서 묘한 느낌을 받으셨다는 말씀,
      이해합니다.

      배가 부르고 오래된 텔레비젼이 있었죠.
      그 덩치에, 안방 제일 좋은 곳에 자리했었고요.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다 알고 있는 역사창고' 라고까지 하신 분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 style esther2020.03.18 11:27 신고

    아주옛날, 혼자 자취하던 시절
    한밤중의 공포를 달래주던 tv가 고장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옵니다.
    실내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부러뜨리고 난감했던..
    시인과는 다른 감상이지만..^^::

    답글
    • 숲지기2020.03.18 22:55

      티비가 한밤중의 공포를 달래준다고요?
      제가 모르는 좋은 방법입니다.
      사실 저는 거실에서 티비를 없앤지 꽤 되지만,
      무서움을 달래준다시니
      솔깃합니다.

    • style esther2020.03.21 01:59 신고

      20대에 혼자살때 무서운 일이 많았거든요.
      밖에서 들으면 집안에서 대화하는 것 처럼도 들리겠다 싶었고
      저자신은 또 그 작은소리에 의지했던 것 같아요.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 숲지기2020.03.22 23:29

      그런 시절이 있으셨네요.
      '혼자 살 때, 작은 소리에 의지한다'
      일단 써뒀습니다.
      어쩌면 생각의 깊은 샘이될 듯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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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슴시녀2020.03.20 05:19 신고

    저도 텔레비죤은 보진 않치만 작은 소리로 켜놓고
    있다보면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특히 어쩐지 으스스한 호텔에서요)
    보지도 않는 티비를 항상 키곤 했었답니다. ^^

    답글
    • 숲지기2020.03.20 22:55

      이해합니다.
      시차적응 바로 하고, 여러 나라에서 가장 편하게 지내야 하셨을테니까요.
      아무리 험난한 곳에서도 CNN은 나오니
      생각해보니 저도 늘 그 방송을 켜놓곤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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