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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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2. 9. 1. 19:47

 

 

 

9월과 뜰

/ 오규원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맹이(문학과 지성사 2005) 

 

 

 

 

 

그 고요의 방 한 칸

​/박해림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닐지 모른다

내 것이 아닌지 모른다

누군가

지쳐 훌훌 벗어 던진 허물

성가셔서 물리쳐버린 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

풍경에 놓인 징검돌이거나

침묵의 배경일지 모른다

하루하루 견딘다는 건

본래의 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 불과한 것

슴슴한 햇빛 아래 줄타기 놀이인 것

사투이거나, 몸부림이거나…

사막 한가운데를 달리는 우물 속 고요이거나

낯선 섬 하나 웅얼웅얼 바다를 열어젖히더니

모래밭에 발을 묻고는 고요를 넘어뜨리며 쳐들어오는데

ㅡ계간 『시와 소금』(2022, 가을호)

 

 

 

 

 

 

 

굽은 나무가 더 좋은 이유
/구광렬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높은 곳만 바라보지 않고
낮은 것도 살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부드럽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땅에다 뿌리를 두고 하늘을 기리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일까

비틀대며 살다보면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의 가치를 알게 되고

하늘 한 번 쳐다 보고
땅 두 번 살피다 보면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런 날

​/문현미

새가 창문에 똥을 찍ㅡ 싸고 날아가고

어디선가 청바람이 설렁설렁 불어오고

햇빛, 그 환한 길 따라 꽃물결이 일렁이고

누군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눈부신 포옹을 하고

나는 화장실에서 먼 훗날을 경쾌한 속도로 스케치하고

하루치 입속의 행복이 노을빛 완경으로 익어가고

저녁에는 눈꺼플이 쉬이 나른해지는

아이처럼 두 손 꼬옥 붙들고 꿈나라에 들고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이, 얼룩도 없이

ㅡ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2022, 8월호)

 

 

 

 

캄캄, 덮일 때까지
​/구재기


갈매기는 결코
심심풀이로 허공으로 떠오르지 않고
물낯에 함부로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무수한 사람들이 헤엄쳐 나아가는 곳
끊임없이 밀려오다가 바삐 돌아서
바닷속에 뛰어드는 물결 사이로
짐짓 멈추는 바람을 보았는가
마음이야 바닷속같이 맑고 고요하지만
결코 쉽사리 끝내지리라는 일이
마냥 기다린다고 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움은 저물녘을 아리게 맞아주지 않는다
한낮부터 데워진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린 시각
해질녘의 어둠처럼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할 수 없는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바다에 들고 보면
붉은 기운이 고되기 시작하는
기다림은 아, 이것으로 끝나려나 보다
기다림은 결코 기다림으로 끝나리라는 걸
기다려서 되는 일은 아니라는 걸
한여름의 붉은 바다
깊이 빠져버린 그림자처럼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기로 한다
저물녘의 어둠으로 캄캄, 덮일 때까지



ㅡ계간 『시와 소금』(2022, 가을호)

 

 

.......................

***

벌써 9월이다

 

***

이미 너무 늦었고,

너무 늦어버리도록 최소한의 것도 하지 않았음이 증오스러웠다.

내 몸을 형성한 세포구조가 가증스럽고

가증스런 내가 쓴 글, 입으로 뱉은 말들은

죄송하지 않은 것이 없다.

 

***

얼마간 이렇게 지낼 것이고,

그럼에도

잘 지낼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진은 루에슈타인 이라는 블랙포러스트 고지대 스키장을 올라서

그 능선을 디디며 찍었다.

20년도 훨씬 전에 이 지대에 불었던 폭풍 탓에

높은 나무 하나 없는 평원을 자주 만난다.

그 평원에는 이게 기회다 싶은 에리카와 블루베리 등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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