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10월에 읽는 시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0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2. 10. 1. 07:47

 

 

국수 법문

/이상국

 

그전에 종로 어디쯤

머리가 하얗게 센 보살이 끓여주는

국숫집이 있었어.

 

한그릇에 오백원

더 달라면 더 주고

없으면 그냥 먹고

그걸 온 서울이 다 알았다는 거야.

 

그 장사 몇십년 하다가 세상 뜨자

종로 바닥에 사리 같은 소문이 남기를

 

젊어 그를 버리고 간 서방이 차마 집에는 못 들어오고

어디서 배곯을까봐

평생 국수를 삶아

그 많은 사람을 먹였다는 거야.

-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2021

 

 

 

 

 

슬픔은 헝겊이다

/문정희 

 

몸에 둘둘 감고 산다

날줄 씨줄 촘촘한 피륙이

몸을 감싸면

어떤 화살이 와도 나를 뚫지 못하리라

아픔의 바늘로

피륙 위에

별을 새기리라

슬픔은 헝겊이다

밤하늘 같은 헝겊을

몸에 둘둘 감고

길을 나서면

은총이라 해야 할까

등줄기로 별들이 쏟아지리라

-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민음사 2022

 

 

 

 

 

업어주는 사람

/이덕규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선뜻 업히지 않기에

동전 한 닢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업히는 사람의 입이 함박만해졌다고 한다

찰방찰방 사내의 벗은 발도 즐겁게 물속의 흐린 길을 더듬었다고 한다

등짝은 구들장 같고

종아리는 교각 같았다고 한다

짐을 건네주고 고구마 몇 알

옥수수 몇 개를 받아든 적도 있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 주고 그날 받은 삯을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일생 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살아서

일생 남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버티고 살아서

그가 죽었을 때, 한동안 그의 몸에 깃든

다른 이들의 체온과 맥박을 진정시키느라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여름호

 

 

...............................

 

 

... 서둘러 색을 지우는 중의 노을 풍경

구름으로 써내리는 하늘 무협지.

저 사진을 찍은 직후 하늘엔 거짓말처럼 색이 사라졌다. 

 

흐리거나 비오거나 안개끼거나 할 뿐인

유럽의 가을이 도착했다는 것.

색이 사라진 그믐의 하늘 틈에서 소나기까지 내렸었다.

 

... 국수 법문에서 국수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슬픔의 헝겊 옷이 날줄 씨줄 젖는 그믐이 다시 온다면 

한 솥 손국수부터 끓여야지.

 

... 10월이다.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에 읽는 시  (10) 2022.12.01
11월에 읽는 시  (0) 2022.11.01
9월에 읽는 시  (8) 2022.09.01
8월 초하루 시편지  (0) 2022.08.01
7월초하루 시편지  (0) 2022.07.0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