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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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2. 11. 1. 09:14

그림/헬가 게르츠 HELGA GERDTS

 

모과

​/정호승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보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울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꺼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그림/프랑크 쾹쉬Frank Koebsch

 

눈길

/문태준

혹한이 와서 오늘은 큰 산도 앓는 소리를 냅니다

털모자를 쓰고 눈 덮인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피난하듯 내려오는 고라니 한마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라니의 순정한 눈빛과 내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추운 한 생명이 추운 한 생명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

 

 

 

 

 

 

 

... 

 

...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일로, 참 무겁게 시작하는 11월이다.

 

... 제사나 기일을 기념하지 않는 독일에서는 

11월 1일을 가신 영령들을 기리는 날*로 정해서 범 국가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범국가적인 공휴일이라고 쓰니 대단할 것 같지만 

조용하고 경건하게 성묘를 하며 보낸다.  

 

... 그런가 하면 텃밭 물길인 수도를 오늘부로 잠궜다.

겨울 동안의 동파를 방지하기 위함인데,

내년 식목일 즈음해서야 일괄하여 수도관을 열게 된다.

설령 늦은 가을이나 때 이른 봄에 목 마른 식물이 생긴다 하여도

천수답 상태로 빗물을 받아야 한다. 

무늬만 농부인 나는 수돗물 나올 때까지 기다려서 농사한다. 

 

 

... 모과와 인생이 새끼를 꼬듯 이어가는 시.

2번째 연부터 '썩어가는'이 나온다.

마치 시에 심어 놓은 암호처럼 '썩어가는'이 반복될수록 

모과 냄새가 진동한다. 

읽을 뿐만 아니라 냄새로도 맡는 시.

 

... 추운 날 숲에 든 선인이 또 하나의 선한 눈빛을 조우하였다. 

닮은 서로 주시한 그 접점에서 

다시 멀어지는 곳을 '고요한 쪽'이며 굳이 '놓아 주었다'고 썼다.

숲마을에 흔한 일을 문시인이 어찌 알았을까. 

 

 

 

 

 

 

*Allerheiligen Feier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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