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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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과 아사코

숲 지기 2018. 4. 12. 00:11

 

요 며칠 낯선 마을을 운전하는 중,

길섶까지 가지를 늘어뜨린 목련꽃들을 자주 본다.  

살짝 가슴이 데이는 순간이다.

어둠이 덜 가신 새벽녘임에도 잎 없이 피어난 목련꽃 가지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꽃잎이 막 벙그는 목련은 아사코를 연상케 한다.

수필가 피천득씨의 <인연> 속의 그녀를 나는 여학교 국어책에서 만났었고

4월 이맘때면 그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산다.

목련꽃이 피어 있던 모교에서 교복입은 우리는 그림 같은  연못가 벤치에 앉아

무슨 이야긴지를 했었다.

......

 

작가는 아사코를 3번 만났다. 만난 횟수만큼 등장하는 꽃도 3종류인데

스위트피, 목련꽃,백합이 그것이다.

 

첫 만남에서는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두번째는,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라고 썼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고 회고한 세번째는 백합이 등장한다.

 

하많은 꽃 중에 하필이면 백합에게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불명예를 안겼을까?

'그리운 대상일랑 애써 재회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는 교훈적인 일침.

이 수필은 사실 맨 첫 문장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에 내용의 전부가 축약되어 있다.

 

출장 중인지라 오늘은 여기까지.....

(글의 말미에 수필 <인연> 전문을 옮겨 실었다.)

 

 

 

 

 

사진은 모두 작년이맘 때에 찍었었다.

 

 

 

 

 

 

 

 

 

 

 

 

 

 

귀가를 하면 보러 가야지, 영양이 된 청순한 아사코, 그녀를 닮은 이 꽃들을.

 

 

 

 

 

 

 

 

 

 

인연(因緣)
/피천득(皮千得)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聖心) 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연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졌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로 무렵, 나는 아사코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 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아시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二世)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二世)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 숲지기2018.04.11 20:24

    수필을 옮겨 왔는데, 몇 군데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 할 수가 있으니
    필요할 시엔 스스로 교정을 하며 읽으시길.

    답글
  • 안나2018.04.12 07:45 신고

    그곳에 핀 자목련은 이곳처럼 아래도 가지가 늘어지네요.
    한국의 나무는 꼿꼿하게 초롱을 달듯 자라는데요.
    저리도 화려한 꽃나무를 보면 봄이 실제로 형상이 있는것으로 느껴져요.
    숲지기님 드디어 봄을 만나시겠구나...그 봄 만져보고 향기맡고,
    긴 겨울을 털어내세요.

    꽃으로 표현되는 여자,
    백합에 대한것은 저도 숲지기님과 마음이 같네요.
    예전 소녀적 수필을 다시 읽으니 그시절 기분이 나는데...전 이상하게 저
    유명한 수필이 그다지 맘에 와 닿진 않았어요...너무 인위적이다...싶은게,
    다만 그시절을 돌이킬수 있음은 좋아요. 어린시절 감상을 다시 돌아볼수 있으니요. [비밀댓글]

    답글
    • 숲지기2018.04.12 22:41

      아까 낮에 썼던 댓글은 다 날아갔었지요, 날개가 달렸었나 봅니다 ㅎ

      수필에 대해서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과서의 위력이라는 게 대단해서
      이 작품을 말하지 않고는 우리의 수필문학을 말 할 수 없지 싶습니다.

      우리나라 목련이 다르군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인데, 고맙습니다 알려주셔서.

      지금 머무는 카셀에선 봄이 초 고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집 앞 신호등이 있어서 늘 멈추는 곳에 벚꽃이 만발했는데,
      어제 보니 아 벌써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거예요.
      차 주차를 하고 일부러 다시 가서 그 밑을 서성이다 왔습니다.
      [비밀댓글]

  • 성공맨2018.04.12 10:08 신고

    오늘 하루도 행복이
    넘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답글
    • 숲지기2018.04.12 22:41

      님께도 행운의 하루를 빌어드립니다.
      건강하시고요.

  • 추풍령2018.04.13 17:18 신고

    어둠이 덜가신 새벽녘에 목련곷 늘어진 낯선 마을를 달린다? 4월 이 좋은 계절에 무슨 사연으로 새벽부터 긴 여행을 하게 되셨나요? 목련꽃 피는 봄날, 교복입은 친구과
    연못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글쓴이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름니다.
    피천득씨의 "인연"이란 수필은 내가 학교 다닐때 국어 교과서에 없던 글인데 숲지기님이 올려주셔서 감동 깊게 읽었읍니다. 본인도 일본에서 태여나 한국으로 귀국한 처지라서 아사코의 순정이 잡힐듯 합니다. 피천득씨의 "인연"은 님 덕택에 처음 접했고
    청순하고 참신한 글귀가 가슴에 와 닫는군요.

    답글
    • 숲지기2018.04.15 17:59

      일본에서 태어나셨군요 추풍령님께선요.
      저의 부모님께서는 일본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셨지요.

      엊그제 7중부독일에서 바이마르까지 들러서 7비 오다말다 하는 거리
      7백 킬로미터를 운전했습니다.
      낮엔 봄경치도 보고 그런대로 할 만한데, 밤운전은 고역입니다.
      밤에 진눈개비 오는 거리는 더 하고요 .

      추풍령님께서도 교복을 입으셨지요?
      저도 여중 여고를 다....ㅎ



  • 노루2018.04.14 00:53 신고

    언제 봐도 역시 서양 풍경은 우리네와는 딴 세상이란
    느낌인데 지금은 저렇게 활짝 핀 자목련을 보면서
    거기와 여기 콜로라도가 또 딴 세상이란 생각을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밤새 또 눈이 내려 겨울 풍경이던
    뒤뜰에 오후 네 시인 지금은 언제 눈이 왔나 싶네요.

    서울에 있으면서 사서 읽은 책 중에 하나가 피천득 수필집
    "인연'이었는데 여기서 또 읽으니 좋으네요. 몇 권 읽은
    다른 이들의 수필집과는 달리, 써야 해서나 쫓기면서 쓴
    글들이 아니란 느낌이 좋더라고요.

    답글
    • 숲지기2018.04.15 18:02

      세상의 읽을 거리 가운데
      마감때문에 억지로 쓰는 글이 아닌 게 얼마나 될까요?
      그러고 보면 독자들이 불쌍합니다.
      작가들은 더 불쌍하고요.

      인연을 그 사이 두번이나 읽으셨군요.
      저는 읽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다행히 그래서 만났고 여기로 모셔올 수도 있었고요.
      여고때 국어선생님께선 작품 전체를 다 외서 수업을 하셨습니다.
      그땐 별것 아니라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대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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