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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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8. 12. 1. 00:11

 

 

 

 

 

축하합니다
/정호승

이 봄날에 꽃으로 피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이 겨울날에 눈으로 내리지 않아
실패하신 분 손 들어보세요
괜찮아요, 손 드세요, 손 들어보세요
아, 네, 꽃으로 피어나지 못하신 분
손 드셨군요
바위에 씨 뿌리다가 지치신 분
손 드셨군요
첫눈을 기다리다가
서서 죽으신 분도 손 드셨군요
네, 네, 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실패를 축하합니다
천국이 없어
예수가 울고 있는 오늘밤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희망없이 열심히 살아갈
희망이 생겼습니다
축하합니다

ㅡ시집<끝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 2018

 

 

 

 

 

 

 

 

밤이, 밤이, 밤이

/박상순

 
밤이 일어선다. 밤이

 

걷는다. 길고 긴 글자들을 가진 밤이 걷는다. 황혼의 글자는 바다를 건넌다. 바람의 글자는 빗속에서 태어났다. 12월의 글자는 여행가방을 꾸렸고 월요일의 글자는 별을 좋아했다. 화요일의 글자는 거짓말을 했고 수요일의 글자는 딴생각을 했고, 금요일의 글자는 목요일의 글자 뒤에 숨었다. 3층에서 태어난 글자는 토요일의 글자와 사랑에 빠졌다. 봄의 글자는 4층에서 떨어졌고 여름의 글자는 맨발로 나타났고, 낙엽들의 글자는 첫눈을 기다렸다. 시계 속의 글자는 해바라기가 되고 싶었고, 병 속의 글자는 바퀴가 되고 싶었다. 창밖의 글자는 부엌이나 침대가 되고 싶었다. 길고 긴 어둠의 끈을 가진 밤의 글자들을 품은 밤이 일어선다. 밤이 걷는다. 내 얼굴 위로 밤이 걷는다.

 

밤이, 밤이,

무너진다. 밤이

 

주저앉는다. 큰 키의, 짙은 눈썹을 가진 밤이, 깊고 어두운 글자들을 품은 밤이 무너져 내린다. 밤의 글자들이 내 얼굴 위로 쏟아진다. 바다를 건너가던 황혼의 글자는 섬이 되었고, 빗속에서 태어난 글자는 우산을 두 개나 잃어버렸다. 12월의 글자는 발목을 다쳤고 월요일의 글자는 뒤로 자빠졌고, 거짓말을 하던 글자는 시계 속으로 들어갔고, 딴 생각을 하던 글자는 금요일의 글자와 머리를 부딪쳤고, 목요일의 글자는 몸무게가 8킬로그램 늘었고 숨어 있던 글자는 길을 잃었고, 3층에서 태어난 글자는 손톱 끝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4층에서 떨어진 글자는 물속에 빠졌고, 토요일의 글자는 가을 내내 양파 껍질을 벗겼고, 맨발의 글자는 얼굴이 온통 빨개졌고, 첫눈을 기다리던 글자는 눈 속에 파묻혔고, 해바라기가 되고 싶은 글자는 낮게 흐르는 강물이 되었고, 바퀴가 된 글자는 창고 안에 던져졌고, 창밖의 글자는 아직도 거리에 서 있는, 깊고 어두운 밤의 글자들이, 밤이,

 

무너진다. 내 얼굴 위로 밤의 글자들이 쏟아져 내린다. 네가 어둠 속에 빠진 날, 밤이 너를 보고 놀란 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내 얼굴을 보고 휘청거리며 네가 캄캄한 벽 쪽으로 쓰러지던 날, 네가 내 앞에 주저앉던 날, 밤이.

 

 

 

 

 

 

 

 

잊혀질 권리

/이향란

 

여인의 몸을 빌려서까지 태어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러나 다시 시작하겠다. 성별과 이름과 출생지를 이곳이 아닌 이 자리가 아닌 곳으로부터


그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나무와 새와 강과 하늘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나를 거두고자 한다. 잠 못 드는 밤 시 한 줄 쓰기위해 끌어다 썼던 어둠과 그 어둠 속 별들을 다시 닦아 내어놓는다. 내 안에 갇혀 답답증을 유발하던 마음에게는 통창을 만들어 흘러가게 하겠다.


어느 이와 인연을 맺었던가. 누구와 인생을 엮었던가. 그들에게서 나를 훑어버려 허허벌판의 바람으로 살겠다. 누구를 아프게 했나. 누구를 버렸었나. 어느 이의 사랑을 외면했던가. 두루두루 살피면서 새로 태어날 나를 위해


이제부터는 나를,
제발 나를 잊어주기 바란다.
머나먼 기억으로부터 삭제해주기 바란다.


당신과 그들 모두에게서 나를 회수한다.
제발 잊어 달라 어떻게든 잊어 달라
그래야 내가 시작할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1) 개인이 인터넷상에 올라와 있는 자신의 정보를 관리할 수 있는 권리.

 

 

 

 

 

 

 

시, 부질없는 시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못나고 부끄러워서 구석에 밀쳐만 두었던 것들을 꺼내어 

하나씩 손빨래 하듯 들춰보는 달 

12월이다.

올핸 특히 후회할 일이 몇 있다.

나 같이 형편없는 인간의 볼멘 소리를 참을성 있게 들어준

나무들아 숲들아 숲 같은 사람아

용서해 주시라 .

 

#...................

 

11월 한달은 시를 많이 읽었다.

다행히 세상엔 읽을 게 많아서,

글로 써진 것도 읽고 사진에서처럼 밤동안 하얗게 써놓은 시들도 읽었다.

내가 유일한 독자였을 흑림 겨울 개울가(사진들) 저 습작시들은

지워지기 전에 읽어야 한다.

 

#.....................

 

정호승님 박상순님 이향란 정현종님의 좋은 시들 읽음에 감사드린다.

 

 

 

 

 

 

 

  • 노루2018.12.03 02:55 신고

    누군가 밤새 쓴 저 '하얀 시'
    시로 시를 사랑하는 그 사랑
    무딘 나도 조금은 알겠네요
    날 밝기 전에 내 속으로 녹아든

    자연은 연습하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들어요. 습작시라니요? ㅎ

    답글
    • 숲지기2018.12.03 14:04

      노루님꼐서 무디시다니요 하하
      저도 소원해 봅니다.
      뭘 끄적거려서 단 한번이라도 노루님 같으신 고급독자님께
      읽어주시는 영광을 얻고 싶습니다.

      흑림은 어딜가나 조그만 도랑이 있고(그 도랑들은 절대로 숨길 수 없지요,
      졸졸졸 물소리가 나니까요),
      겨울엔 저렇게 새하얗게 아침을 맞을 때가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노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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