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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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9. 2. 1. 00:11

 

산꼭대기 집 너머로 해가 넘어갔다. 이하는 하산하며 찍은 사진들.

 

 

모서리

/최서림

시는 모서리지
둥근 원이 아니다.
시인이 모가 났는데
시가 둥글면 가면처럼 쓸쓸하다.
시인이 둥글다는 것은
지나친 인격자란 것이다.
세상과 맞붙어
싸울 바보가 못 된다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상처도 없이
매끄럽게 잘 살아낸다는 것이다.
시가 빨아먹고 자랄
진물이 없다는 것이다.
진물은 生의 모서리로 모인다.

 

ㅡ문학의 오늘 2018, 겨울호

 

 

 

 

 

 한대의 차가 바로 코 앞에서 거의 걷는 속도로 간다. 고맙다.

 

 

 

 

신체와 콘트라베이스

/송재학

 

잠들지 못하는 밤의 손발로 나무를 깎아 떠나는 사람을 베꼈더니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온몸을 내어주었더니 누군가 아가미만 남긴 채 속을 헐어내고 뉘엿뉘엿 편서풍에 헹구었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섞이고 마주치는 음역 사이 인기척이 더디면서 생의 잎새는 한 뼘 더 길어진다

 
그때 떨림은 온몸을 몇 차례 돌아다닌 핏물과 다름없다 그게 급기야 슬프디슬픈 입구가 되었다 사람은 저녁을 되풀이하는가 보다

 
꽃을 보아도 후회가 맨 앞, 약음기를 통해 체온이 부풀면서 공명통을 채우는 억양들

 
입이 부르튼 통점 그리고 멀리 떠나는 사람이기에 얼룩은 남는다 속삭임은 기어이 모든 나뭇잎의 입말이고 말지

 
무언가 삼켜야 어딘가 시큰거려야 토해낼 수 있는 소리가 있다면 적층 대신 깎아서 이루어진 소리 또한 있다


죽음처럼 불가피해야만, 불가촉의 저음이 고이지 않을까

ㅡ시와 반시 2018, 겨울호

 

 

 

진눈개비가 그치자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다.느린 건 저 앞 자동차 뿐.

 

 

 

 

겨울 기도 1

/마종기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의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자동차 왼쪽 위, 장난처럼 그어진 불빛이 슈트라스부르크(프랑스)로부터 온 것.아래 사진에는 아주 조금 더 선명하다.

 

 

 

겨울 기도 2

/마종기

 

1

이 겨울에도 채워주소서.
며칠째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손 내밀면 멀리 있는 약속도 느끼게 하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도 듣게 하소서.
떠난 자들도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포근하게 긴 잠을 자게 하소서.
왜 깨어 있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마시고
당신에게 교만한 자도 살피소서.
어리석게 실속만 차리는 꿈속에서도
당신의 아픔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2

내가 눈물을 닦으면
당신은 웃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의 노래다.
노래 속의 기쁨이다.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저 멀리 다음해까지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ㅡ 그 나라 하늘빛 1991,문학과지성사

 

 

 

 

 

사진 왼쪽 위 미미하게 펼쳐진 불빛들이 슈트라스부르크. 흑림에선 블란스가 보여요. 아주 잘 보여요.

 

 

29

/이종민

아플 일만 남았어 이번 생은
오랫동안 입지 않은 셔츠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일


내가 씻을 때
훌훌 벗어놓은 옷이 예쁘게 개어져 있던 기억을 아직 사랑하는 일
 

우리는 글 안에서만 아름답고 기억 속에서만 예쁠 거라는 예감


양파 썰고 버섯 썰고 미역 볶는 냄새가 주방을 가득 메울 때
이런 게 바로 삶이라 생각하다가
차린 상 앞에 앉으면 불현듯 찾아오는 적막


서랍 속 숨겨둔 편지 몇 장
가방 속에 구겨 놓은 알약 몇 봉


많은 말이 필요했지만 이제 그보다 더 많은 말이 필요해서


개수대에 쏟는 밥알들
들통에 쏟는 식은 미역 줄기
실수로 들어간 양파 꼭지나 냉장고 속 리모컨 같은


올이 풀리기 시작하는 스웨터를 입고
너를 안으면 실밥이 네 외투 지퍼에 자꾸만 걸려서


ㅡ열린시학 2018, 겨울호

 

 

 

누가 낙서했어? 하하 가끔은 카메라가 야~하다.

 

 

 

속상한 일

/박지웅

나무에 소금 먹인다는 말을 들었다

뿌리둘레에 소금자루를 묻어 놓으면

천천히 독이 퍼지면서 비실비실 말라버린다니

참 못할 짓이지 싶은데

마음 구석에 슬쩍 생겨난 소금 한 자루

자루 입을 몇 번 풀었다가 묶었다

맹지에 길 내자고 소금자루 메고 가

산어귀 나무에 흰 고깃덩어리를 먹였는데

기다리는 비 한 방울 없더란다

걸핏하면 빌고 야심차게 기도하는 것도

참 몹쓸 짓

물을 켜도 혓바닥이 비실비실 마르더란다

가슴 한쪽이 쓰라리더란다

치워도 꼭 그 자리에 소금 한 자루가 터져

악독하게 소금을 치더란다

ㅡ주변인과 문학 2018, 겨울호

 

............//

 

요즘은 시도때도 없이 하늘이 바쁘다. 비가 내렸다가 구름으로 꽉 막았다가 여차하면 물방을을 분무해서 옆집도 안 보이도로 아리송하게 만들기 일쑤. 오늘은 그나마 아침나절 진눈깨비 한 차례 내리다 말았으니 하늘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다. 2월엔 더도 덜도 말고 눈 좀 덜 내려 주시라.

사진과 시들의 관계가 참 멀다. 모르는 바 아니지만 찍어둔 사진이 없어 운전 중 부랴부랴 몇 컷 누른 것으로 올린다. 이 사진들도 앞차(프랑스 차번호를 단)가 거의 기어가는 속도를 유지해 주었으므로 가능하였다.

늘 같은 느낌이지만 시들을 싸이트에서 옮겨옴에, 시인들과 시를 읽게 된 그 과정까지 비슷한 일을 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번 시들 올려두고 잘 읽을 거라고.

2월엔 쓰레기 생산을 가능한한 줄이고, 더 많은 창작시들을 읽어야지. 

 

  • 장수인생2019.01.31 23:53 신고

    아름다운시 입니다
    명절이 얼마남지않았습니다
    즐거운 연휴보내세요^^

    답글
    • 숲지기2019.02.01 12:32

      파란장미님 잘 지내시지요?
      명절이 곧 오나 봅니다, 기쁜 날들 맞으십시오.

  • 노루2019.02.01 05:06 신고

    맨 위 사진도 좋고 그 아래 사진들도 좋으네요.
    시는 한 번씩은 다 읽었지만 다른 날 또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ㅎ

    답글
    • 숲지기2019.02.01 12:39

      다른 건 몰라도 시읽기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다 하여도
      언어의 꽃인 시는 늘 어딘가에 피어나는 것이니까요.

  •  
  • 파란편지2019.02.01 15:02 신고

    신체와 콘트라베이스는 자꾸 되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치열하구나 싶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싶었습니다.
    예전에는 시를 써볼까 싶었었는데 이런 시를 볼 때마다
    그만두길 잘했구나 싶어집니다.
    좋은 시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
    • 숲지기2019.02.01 23:28

      말을 벼리는 것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있는 분이라 여깁니다.
      송재학님은 유명한 장엄송의 '송'이시고요,
      운 좋게도 저는 뵌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요.
      간만에 본 신작시인지라 반가웠습니다.

      콘트라바스가 여체를 참 닮았기에
      그리고 그 재질이 텅 빈 나무이니 시 쓰는 사람들이 말 걸기에 좋은 소재입니다.
      의외로 악기연주자들은 그런 생각들을 안 하더라고요
      왜 그럴까 한번은 고민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악기를 1인칭으로 여기더군요.
      같은 몸이라 따로 묻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죠.

  • 사슴시녀2019.02.20 08:47 신고

    반가와라! 흑림에서 언덕을 넘나들며
    스트라스버그을 바라보았던적이 있었더랬고 랜트가
    네비게이션만 믿고 가다가 Bitch라는 작은마을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그곳 시장님과 인사도 하고 그 마을 구경도 했었지요.
    그 언덕을 숲지기님이 다니신다 생각하니
    많이 반가와요!^^

    겨울기도
    하나님 추워하며 살게 해주옵소서...
    참 좋습니다!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 깊게 다가오는
    기도문요~

    답글
    • 숲지기2019.02.28 17:05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저도 아주 잠시 다른 곳을 다녀올 땐 숲이 정말 그립답니다.
      소박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사슴님 다녀가셨었다니 마음이 찡합니다.
      프랑스와 가깝다보니, 숲에 그쪽 번호 차들이 자주 옵니다.
      사슴님네도 캐나다 분들 자주오지 않나요?
      제가 잘못 알 수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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