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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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림에서 띄우는 12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6. 11. 30. 09:20











지난 11월 힘든 날들을 사느라 애쓰셨습니다.

촛불로 아우러진 마음들이 닿았기라도 하듯, 하늘도 위로의 첫눈을 뿌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벌써 12월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제 기껏 한달 밖에 남지 않았거나, 

여전히 서른 한번의 녹녹한 날들이 올해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할일이 많은 저는 날짜에 짙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하루하루 보낼 것입니다. 


지난 여름에 이어 올해의 마지막 초하룻글을 쾌히 써주신 purewater님과 

이달의 시편지에 수록한 시를 쓴 시인 분들 고맙습니다. 

성탄의 기쁨을 소중한 분들과 나누시고

저무는 한해를 건강하게 마무리하십시오. 


한햇동안 감사했습니다. 











/purewater


눈이 왔습니다

첫 눈이 왔습니다

뭐라도 새로운 일이 벌어져야 그걸 빌미로 편지를 쓸텐데 하고 걱정했더니

정말 첫 눈이 와 줬습니다

첫 눈 오는 날 몇 시에 어디 어디서 만나자고 하던 약속

이 나이에 한다면

낭만이 될지 청승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그 마음으로 되돌아 빨리 거기로 나오라고 하고 싶습니다

눈 맞으며

호빵 뜨거운 김 불어내며 강아지처럼 쏴돌아 다녀 보고 싶습니다


이건 단팥 호빵

이건 야채 호빵

뭘 좋아하셨나요?











겨울 꽃밭 

/이안



꽃 진 꽃밭에 가서 꽃을 보았네
꽃 없는 열매가 메마른 향기를 감추고 있었네
부서지는 껍데기 속에서 부서진 알맹이가 흘러내렸네
나는 부서진 꽃 안으려다 말고
그 꽃의 껍데기와 알맹이 거두려다 말고
산산이 흩어놓았네
처음을 묻자 모든 길이 끊어지자
대답 없이 눈이 내렸네





12월

/임영조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끔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낙엽이 전하는 송년사

박희호

 

한나절 말미에 내려앉은 볕 따라

선잠 깨운 가지 책망소리 들으며

세상의 중심이 되려는 소망하나로

한 뼘 뜨락 고운 날빛에 서투른 움을 틔웠지요

버선발 가파르게

단명의 슬픔 딛고 화려하게 핀 들꽃,

불꽃처럼 사그라들 때

민중의 성근 땀 식힐

짙푸른 그늘을 꿈꾸었습니다.

숱한 비바람의 횡포 침묵으로 흔들리며

흰 이마 농부의 한숨빛 그늘에 닦아 청 하늘 채색해

기도로 메웠습니다.

칡넝쿨 동여맨 바위 아래

한 톨 풀씨 숨소리 가꾸며

돌팍 물드는 계절 앞에

그 봄 화려한 꽃이 부러워

붉게붉게 속살 탈색시켜 보지만

후두~둑 겨울비에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혼절한 민초 홑이불 되려

무서리 하얀 고명

해거름에 말렸건만

~~ 윤회의 사립 밖,

이제 어느 책갈피 속 추억으로 누워

남은 온기 말려 화석이 됩니다.

그대 결빙의 창 닦으면

나의 한해 서투른 언어

푸른 달빛 켜 놓은 채 서성이오니

시인이여!

이 밤 잠들지 마옵소서.


너른고을문학 20(한국작가회의 경기광주지부, 2015)





빈집

/백무산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 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벵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계간『창작과비평』(2012, 여름)

 




송 년 
/김 규 동  

기러기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들일까 가고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같이 
믿어달라는 하소연과도 같이 
짓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겨울에 대한 질문 

/ 이장욱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내가 당신을 함부로

겨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어느 날 당신이 눈으로 내리거나

얼음이 되거나

영영 소식이 끊긴다 해도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사육되는 개가 조금씩 주인을 길들이고

무수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감상하고

가로등이 점점이 우리의 행로를 결정한다 해도

 

겨울에는 겨울만이 가득한가

밤에는 가득한 밤이?

우리는 영영 글자를 모르는 개가 되는 거야

다른 계절에 속한 별이 되는 거야

어느 새벽의 지하도에서는 소리를 지르다가

 

당신은 지금 어디서

혼자 겨울인가?

허공을 향해 함부로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어느덧 눈으로 내리다가 문득

소식이 끊기고





사람이 시보다 크다

/김 수 열

 

 얼마 전 시인들끼리 송년 자리에서 술잔 기울이는

데 한 후배가, 형은 詩가 커 보였는데 이제는 사람이

더 커 보인다 하길래 원래 크니까 그런 게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뿔뿔 헤어져 돌아오며 그

말 곱씹어보는데

  갈수록 詩가 시답지 않다는 겐지 아니면 詩가 몸을

몸이 詩를 못 따른다는 겐지 그도 아니면 성장 발육

멈춘 지가 하세월인데 느닷없이 더 커 보인다는 건

대체 뭔 소린지, 하는 비틀비틀한 생각으로 지하 주

차장에서 계단으로 들어서는데

  쿵, 하고 천장 들보에 정수리를 받히고서야 확 깨

닫는다

 

그래 나, 크다





말 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버릴까 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 사류로

오염될까 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 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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