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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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문을 두드립니다.

숲 지기 2016. 9. 27. 03:44




10월이 문을 두드립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번엔 특히 10월을 주제/소재로 시를 써준 시인들에게 고맙습니다. 

그들 덕분에 독자들은 10월을 더 10월 답게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년 10월에 저는 숲도시 프로이덴슈타트(Freudenstadt)에서 지냈었고, 

풍경들은 그곳 어느 평원의 가을 모습입니다.

10월에도 시 읽고 쓰는 기쁨과 함께 건강하십시오.



 











밤의 공벌레

/이제니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풀이 마르다

/손택수

 


강이 수척하니 풀도 여윈다  


구월에서 시월로 넘어가는 풀엔

저녁볕을 받으며 서쪽으로 멀어져가는 강물 빛 같은 것이 있다  


몸속에 남은 물방울 몇이 그러쥔 풀의 체취를 걸쭉하게 졸이는 시간  


그건 얼마쯤은 떠나가는 자의 모습이다

떠나가는 저를 붙들고, 슬그머니 손목을 놓아주는 자의

마른 글썽임 


어느 지방에선 수의를 먼옷이라고 한다

잴 수 없는 거리를 옷감으로 한 말  


얼마쯤 저를 이미 저만치 데려다 놓고

떠나온 곳을 이윽히 바라보는 자의 눈빛,  


풀빛이 흐릿해지니 풀 향이 짙어온다  


구월에서 시월로 넘어가는 풀에선 까슬까슬

미리 장만한 삼베 수의 스치는 소리도 들린다 







먼 풍경     

/황명자

 


간월산 오르는 길,
입동 오기도 전에
마른 억새풀 서걱이더니
새싹 하나 불쑥 솟았다


길 잃은 어린 초록뱀이다


좁은 등산길 따라
꿈틀꿈틀 몸 옮기는 뱀은
차디찬 골짜기 돌무덤을 찾아들 터,
그조차도 여의치 못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
얘야, 겁먹지 마라
원래 이 길은 뱀의 길이 아니란다
겨울이 두려운 뱀을 위해
먼저 놀라지 말고
갈 길 내주어야 한단다
불안한 눈빛으로 떨고 있잖니?
불쌍하지 않니?


나조차도 무서워서 돌아가는
거기,
잠시 인적 끊기고
저만치 사라질 동안
길은
먼 데 풍경처럼 까마득하다

 












시월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얼큰한 시월

/전영관

 


작년에 나, 뺨 맞았잖아


장성댐이 깊기는 깊더구만 가을이 통째로 빠졌는데 흔적 없고
조각구름만 떠다니더군 백양사 뒷산 정도야 그 남색 스란치마에 감기면
깜박 넘어가지 않겠어 뛰어들까 싶기도 한데
집사람 얼굴이 덜컥 뒷덜미를 채더군


피라미 갈겨니 메기까지 푹푹 고아
수제비도 구름같이 떠오르는 어죽(魚粥) 한 사발 했지
반주로 농탁(農濁) 몇 대접 걸쳤다가 휘청
단풍에 취한 낭만파처럼 평상에 누웠던 거 아닌가
목침 베고 한 잠 늘어진 뒤 화장실에 가보니 아 글쎄
벌건 뺨에 손자국 선명한 거라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 대고 누워
잠시 딴살림 차렸던 거라 뭣에 쫓기기는 한 듯
뒷골 얼얼하니 내려오는 내내 흙길도 출렁거리더군


오늘 나, 거기로 뺨 맞으러 간다


혼자 쓸 한나절쯤 배낭에 챙겨 넣고 지팡이 들고
는실는실 웃는 고것들 후리러 간다 농탁(農濁)에 엎어진 핑계로
작년처럼 낮잠 한 숨 퍼지르고 올 참이야 한쪽 뺨 벌겋게 얻어터져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      
       

 








저녁의 운명

/이병률

 

 

저녁 어스름
축대 밑으로 늘어진 꽃가지를 꺾는 저이


저 꽃을 꺾어 어디로 가려는 걸까


멍을 찾아가는 걸까
열을 찾아가는 걸까
꽃을 꺾어 든 한 팔은 가만히 두고
나머지 한 팔을 저으며 가는 저이는


다만 기척 때문이었을까
꽃을 꺾은 것이
그것도 흰 꽃인 것이


자신이 여기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소리치려는 것일까
높은 축대를 넘겠다며 가늠을 하는 것일까


나는 죽을 것처럼 휘몰아치는
이 저녁의 의문을
어디 심을 데 없어
그만두기로 한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참으며 걸으려 한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려고 할 때나
아름다움을 받아내려고 할 때의 자세처럼
분질러 꺾을 수만 있다면
나를 한 손에 들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운명이라도 밀어야 한다

 










안내방송

/진란

 

 


구월의 마지막 날이 되자 애정범람주의보가 울렸습니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두어 시간만 지나면 시월입니다

지금은 가을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가을역의 종점에 닿을 것입니다

잊은 것이 없으신지 빠짐없이 주변을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읽으시던 낭만주의보는 가슴에 잘 접어두시고요

콧등에 걸쳐두었던 돋보기는 안경으로 바꿔 쓰십시오

식어버린 커피도 들고 내리시고요

아, 이어폰 대신에 맑은 바람 한 점 귓바퀴에 걸어 두세요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평일이 바로 앞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행복한 하루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사랑한다고 옆 사람에게 나즉히 건네어도 좋습니다

함께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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