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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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7. 11. 1. 04:47

 

 

 

 

 

11월 초하루입니다.

존재감이 미미하여 마치 12월을 준비하는 달처럼 여겨지는 

겸허한 11월이 시작됩니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지금 제 눈 앞에는 바람이 거세지고 

고목에 매달렸던 나뭇잎들이 대거 낙하를 하네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위에 비까지 심히 뿌려대니 

안되겠어요, 

양초라도 켜서 마음을 덥혀야 겠습니다.

 

이번 달엔 '빈집'을 소재로 한 시들과, 모르겐슈테른의 한편도 골라 보았습니다. 

시들의 제목이 같아 빈집이지만 저마다 다른 '빈집'이고, 모르겐슈테른은 특히 동시들이 참 좋지요.

기회가 되면 이곳에도 싣게 되지 싶습니다.

 

매번 같은 생각입니다만 시들을 써준 시인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따끈한 11월 맞으시기를.........

 

 

 

 

 

 

 

 

11월의 나날들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

 

안개가 집 주변에 연기처럼 에워싸면

서둘러 집안으로 세계를 끌어들인다.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감성으로 모든 것이 젖어 든다.

손, 입이 공손해지고

몸짓은 더 고요하며

바닷속인양 비밀스레

사람과 지구는 꿈을 꾸게 된다.

 

 

 

 

 

 

 

 

/기형도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탁탁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이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이 든다. 

 

 

 

 

 

 

 

 

 

빈집

 /박진성

 

  당신은 내게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음악 파일을
보내왔다 나는 비상구를 찾고 있었고 아득한 계단의 끄트머리쯤
당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벼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측백나
무 한 그루가 늦겨울의 햇살을 찌르고 있었고 낡은 모니터가 나뭇
가지에 걸려 있었다 메일이 세 통 와 있었고 꿈결인 듯 잠결인 듯
당신의 머릿결이 만져졌다 나의 신경은 날카로워져서 마우스의 화
살처럼 뾰족한 측백나무 이파리를 자꾸만 떼어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부팅이 되지 않는다 죽은 歌手들이 살던 당신의 집은 검
은 비닐봉지 같은 모니터에 잠기고, 계단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당신의 집에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황사 무렵, 반지하 방 낮은 창으로 모래가 쓸려와 마우스가 서걱
거렸다 까끌까끌한 손으로 당신의 집을 찾아갔을 때 당신이 쓴 시
라든가 음악 파일 몇 개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죽은 가수는
계속 노래하고 있었고 브룩클린으로 간 당신을 생각하자 나는 윈
도우 종료음처럼 쓸쓸해졌다 암호 같은 사랑, 내가 0이었을 때 당
신은 1이었을 뿐 그랬을 뿐

  

 -시집『목숨』(천년의시작, 2005)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송찬호

 

지붕 밑 다락에 살던 두통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그 집은 빈집이 되었다


가구를 들어내 휑하니 드러난
벽들은 망설임 끝에
좌파로 남기고 결심했고


담쟁이넝쿨들이 넘겨다보던
아름답던 이층 창문들은
모두 천국으로 갔다


그리고, 거실에 홀로 남은 낡은 피아노의
건반을 고양이들이 밟고 지나다녀도
아무도 소리치며 달려오는 이 없다
이미 시간의 악어가 피아노 속을
다 뜯어먹고 늪으로 되돌아갔으니


구석에 버려져 울고 있던 어린 촛불도
빈집이 된 후의 최초의 밤이
그를 새벽으로 데려갔을 것이었다


벌써 어떻게 알았는지
노숙의 구름들이 몰려와
지붕에 창에 나무에 각다귀 떼처럼 들러붙어 있다


이따금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그들의 퇴거를 종용해 보지만 부력을 잃고 
떠도는 자들에게 그게 무슨 소용 있으랴
한동안 그들은 꿈쩍도 않을 것이니

  

 

 

 

 

 

 

빈집 

 /박형준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 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보고
달빛이 신어보고
소리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치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밀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 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 안나2017.11.01 08:14 신고

    존재감이 미미한...그러네요. 저에게는 마음을 단단히 하는 달.
    겨울로 넘어가는 달 이에요.
    이제부터 긴긴 어둠과 겨울, 추운 시간을 보내야 하니,
    마음을 다잡고 가야해요.
    한때는 너무 긴 겨울시간 때문에, 너무 많은 눈 때문에...거의 고립된거 같은
    그런 기분으로 지나곤 했어요.
    요즘은 그래도 눈이 조금 덜오니 그나마 지구 온난화가 유일하게 이곳 스웨덴엔
    플러스 된다고 해야하나, 아니 저에게...물론 그래서 여름 날씨가 오히려
    또 안좋은 해가 늘어나서 그것두 실싱은 별로지만요~
    숲속의 겨울은 어떨지 모르겠어요...추수까지 끝나면 숲속엔 정적이 흐르는
    감수성과 명상의 시간이 오려나요?
    감기는 나아지셨나요? 건강하세요~! [비밀댓글]

    답글
    • 숲지기2017.11.01 19:31

      스웨덴의 겨울이 좀 따뜻해졌다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겪었던 그곳의 겨울은 정말 코를 베어가는 듯한 추위였습니다.
      겨울 휴가는 또 얼마나 긴지, 12월 즈음엔 많은 회사들이 그냥 쉬더라고요.
      하하 물가얘기는 안 하겠습니다 ㅎㅎ

      감기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른 증상은 호전이 되었는데 기침은 여전히 성가십니다.
      지난 주말에 숲집에서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낙엽과
      비 바람과 전쟁처럼 지냈습니다.
      갑자기 그곳에서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에 보따리 싸서(야밤에 ㅎ) 내려왔습니다.

      안나님도 건강하십시오.
      저는 기침때문에 아주 고생을 하고 있답니다. 면역력이 한해가 다르게 떨어지는 듯 합니다 ㅠ
      [비밀댓글]

  • Helen of Troy2017.11.02 04:26 신고

    개인적으로 처음 접한 시인의
    좋은 시 잘 감상했습니다.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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