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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에셴바흐, 그의 음악언어가 왜 깊은지 본문
그를 보면 마치 두꺼운 책 한권을 마주한 듯 하다.
호흡할 때 밭이랑처럼 깊어지는 목주름은
심오한 고전시의 행간과도 같다.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셴바흐(Christoph Eschenbach)
1940년 폴란드 브레슬레프,
스승이자 합창 지휘자였던 남자를 사랑했던 여가수는 출산 중에 사망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아이는 4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마저 잃게 되는데,
그 아이가 에셴바흐이다.
고아가 된 그는 먼저 할머니에게 맡겨졌지만 그녀마저 사망을 하고
티푸스가 창궐한 피난민수용소에 맡겨진다.
겨우 5세였던 그는 가난과 전쟁과 병마에 직면한다.
함께 수용되었던 1백 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회상하는 그는,
질병때문인지 고독때문인지 알고 있던 언어를 잊어버리게 된다.
6세가 되어 간신히 살아남았을 때 이모내외에게 위탁되어 북독일로 이주하고,
오랜 병 치유와 함께 언어 또한 기초부터 다시 배우게 된다.
친부모처럼 이모 내외도 음악인부부였는데, 이모부는 그를 입양하여 에셴바흐라는 성도 물려준다.
그러니까 그는 이모부를 아버지, 이모를 어머니로 부르며 다복한 음악가정에서 자랐다.
성탄절에는 온 가족이 성탄 칸타타를 무대 위에서 선보이기도 하였다.
연주댓가는 닭 5마리와 우유 등을 받았는데 그의 기억에는 매우 귀하고 가치있는 댓가였었다고.
그의 시골마을 마을 작은 교회에서 어릴 때부터 오르겔 연주를 했던 그가 10세에 슈타인웨이 콩쿨에서 우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금으로 치면 신동이었고, 그 지역의 소문이 자자한 소년음악인이었다.
그후 더 공부하여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성장하였고
여러 나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과하지 않은 그의 음악적 해석은 뭐랄까,
정돈되고 철저하다.
바흐는 바흐답게 들려준다.
부르크너와 말러의 비교 해석 또한 짜릿하다.
음악에 국수주의가 있다면 제일 먼저 나는 그를 떠올릴 것이다.
독일인이 독일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이맛이구나 싶다.
(사실 이러한 표현과 이러한 문장을 독일인이 썼다면 맹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외국인, 이런 말을 하여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늙어가는 마에스트로,
목소리는 그윽해졌고 젊었던 그보다 지휘언어가 깊어졌다.
대머리는 반짝이고
눈빛은 강렬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https://youtu.be/D1T3vehD9jI?t=14
https://www.youtube.com/watch?v=D1T3vehD9jI
어찌 올리는지 모르겠다.
근래들어 독주를 거의 하지 않는 에셴바흐의 짧고 드문 연주.
트로이메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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