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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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9. 5. 1. 00:11

 

 

 

 

다크사이드 오브 더 문
/윤성학

한 사람은 몇 개의 문으로 이루어지는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어둡고 따뜻하고 미끄러웠다
그의 맨 안쪽에 닿는 문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어둠에 익으며
희미하게 또 하나의 문이 보였다
열고 들어가면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사람의 맨 안쪽에 닿기 위해
몇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가
 
더 이상 머물 이유가 떠오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문을 열고 되돌아 나온다
그의 바깥을 향해
문을 열고 나온다
가장 바깥이라고 생각한 문을 열었는데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더 이상 열고 나갈 문이 없는데
아직 그의 바깥이 아니어서

시인수첩 2019, 봄호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멀리 여행을 갈 처지도 못 되고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디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 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 생을 함께 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에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문예연구 2019, 봄호


 

 

 

 


 

 

그림자를 밟다

/위선환


앞서거니 뒤서거니 또는 옆서거니 했는데, 발바닥을 서로 밟는 일이야 당연하고 발뒤꿈치를 차거나 발등을 밟아도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무릎뼈를, 다음에는 아랫배를, 그다음에는 갈비뼈를 차례로 밟아서 부수고 이제는 목줄기를 밟아서 부순다. 삭정이 같구나. 갈수록 경사가 위험해지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한낮, 밟힐 듯, 조심해서 발을 내려딛지만 아차, 그만, 고작 남은 정수리께를 디디고 만다. 발밑이 푹 꺼지고, 나도 무너져 내린다.


ㅡ시집 '나무 뒤에 기대면 어두워진다' 달아실, 2019

 

 


 

 

 

 

 

 

 

...........................

 

 

 

쓰신 분들 이름만 믿고 급하게 골랐지만 몇 번이고 더 읽게 될 듯한 시들이다.

오월이 오는 중~~(이 포스트는 여전히 4월인 가운데 예약으로 쓰니)~~~~~.

누군가의 돼지저금통에 이 봄을 저축해주면 좋겠다. 사실은 너무나 바쁜 나날 가운데

손가락 몇 개 휴가 내어 쓰는 중이니.........

 

슬플 틈도 없어야 하지만 잠깐씩 하늘을 보는 사이 산 위를 넘는 먹구름이 울먹인다.

봄장마가 올 거란다. 이 계절, 꽃이 되고 싶은 모든 이들이 피어나기를......

 

  • 노루2019.05.01 18:53 신고

    해 나는 한낮에 계단을 내려가다가 "정수리께를 디디고"
    "나도 무너져 내리"는 동키호테도 우습고,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에서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안쪽 문, 바깥 쪽 문을 들락거리며
    '그'를 찾지만, '그'(집 주인) 자신도 종종 그러면서 스스로를
    발견하려 하는 줄은 모르나, 어느 문을 들어서며 대각선 쪽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모양이네,
    그런 생각을 해보네요. ㅎ

    답글
    • 숲지기2019.05.11 11:05

      하하 동키호테 ㅎㅎ
      저 위의 시들보다 노루님의 시 읽으심에 더 재미있습니다.
      윗시들은 '들고나고', '문 열었다 닫았다가' ,'그림자몸까지 마구 밟는' 것으로
      우연히도 연결되는 듯 합니다.
      쓴 사람들이 다 다른데도 말입니다.
      정말 우연인데, 노루님이 바로 뽑으셨습니다.

  • 장수인생2019.05.02 10:49 신고

    근로자의날을지나
    일상으로 돌아온 가정의달5월의
    첫날입니다
    5월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운 나날들
    보내시길 바라면서 올려주신 포스팅 즐감하고 갑니다^^

    답글
    • 숲지기2019.05.11 11:06


      파란장미님도 오월에 피어나는 꽃들처럼
      행복하고 싱그럽게 지내고 계시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  
      •  
  • 사슴시녀2019.05.04 08:11 신고

    Dark side of moon이라 하셔서
    제가 좋아하는 락 그룹 Pink Floid의 노래
    그 "dark side of moon" 인줄 알았는데.. 구절 구절 아주 좋은 시 였습니다!^^
    이 그룹의 노래중 "Wall" 라는곡도 좋습니다.
    시나 수필종류의 책을 일부러 찿아보진 않았지만
    숲지기님덕에 이렇게 대하는 시 구절구절 조용히 곱씹어 보면 아주 좋습니다!
    전 가만히 앉아서 명상 하는것 보단 바쁘게 움직이는걸 좋아하는 편이라선지 음악도 soft rock 을 많이 들었는데 이젠 저도 소곤 소곤한 시와 너무 길지 않다면 크래식도 좋아지네요!☺

    답글
    • 숲지기2019.05.11 11:21

      사슴님,
      요즘 싹들과 함께하며(사실은 지금 출장 중에도 싹들을 데려왔답니다),
      사슴님의 모습을 아주 자주 떠올립니다.
      늘 고마운 마음과 함께요.

      써주신 노래는 처음 듣습니다.
      저는 베토벤의 피아노곡만 떠오르는데 말이지요.
      언제 기회가 되면 꼭 들어보고 싶습니다.

  • 파란편지2019.05.11 15:49 신고

    여러 번 와서 읽었습니다.
    다 읽을 만하였지만 또 읽고 또 읽은 시는 '다크사이드 오브 더 문'이었고,
    잊히지 않아서였습니다.
    제 얘기를 쓴 것 같았습니다.
    제가 썼다면 좋겠다고 쓸데없는 욕심도 부려보았습니다.
    저는 누가 봐도 온 길보다는 갈 길이 아주 아주 짧은데도
    거쳐온 문들을 생각합니다.
    '이게 아니다, 이게 아니다, 이 문이 아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만 들어가고 나가야 할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열어보며 들어가야 할지
    막막합니다.
    '다크사이드 오브 더 문'
    그렇게 이름붙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시, 정말 고맙게 읽습니다.

    답글
    • 숲지기2019.05.11 19:12

      온 길보다 갈 길이 짧다시는 말씀에 일말의 슬픈 여운이 입니다.
      교육자의 본보기로 사셨던 분께서 이 시를 어떻게 읽으셨을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문은 Moon과 門과 우리나라 대통령과 입(Mund)....... 가운데
      그 어느 것을 대입하여도 저 시는 통하지 싶습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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