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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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을 기다리는 시편지

숲 지기 2019. 5. 30. 10:18

 

 

 

 

 

나의 개종
/장석주


 

최근의 내 기분을 녹색이라고 한다면
내 종교는 물푸레나무다.


식물의 기분으로 맞는 아침들,
우리에게 개종을 끝내야할 의무가 있다.


눈꺼풀 없는 눈을 깜박이는
국립생태원의 내 착한 물푸레나무 형제여,


빙하와 수만 밤의 기억을 품고
안개 속에 서 있는 이타적인 내 이복형제여,


저 우듬지에 하얀 소금이 반짝이고
막 터지는 빛 속에서 파랗게 열리는 공중,
발끝으로 서 있는 저 물푸레나무들은
전생이 무용수였던가.


우리가 물푸레나무는 아니더라도
아침이라는 종교를 받아들이자.


개종자들이 아름다움 속에서 질식할 때
당신은 이미 개종을 예비하는 동물이다.

 

ㅡ 시인동네 2019, 6월호

 

 

 

 

 

 

 

 

산, 그리고 인생

/이은숙

 

세상살이나

산山살이나

다를 게 없는데

세상살이만 힘들다 하네

등에 짊어진 무거운 배낭

그 속에 우리네 삶이

빼곡하게 담겨 있어

 

나무의 나이테 같은

굴곡진 여정

안개 속보다

더 깊은 세상 밖으로

우리는 걸어 가네

 

행여 단비 같은

길동무 만나면

야트막한 산 하나

끌고 와야 겠네

 

 

 

 

 

 

 

저녁이 올 때

/문태준

 

내가 들어서는 여기는
옛 석굴의 내부 같아요


나는 희미해져요
나는 사라져요


나는 풀벌레 무리 속에
나는 모래알, 잎새
나는 이제 구름, 애가(哀歌), 빗방울


산 그림자가 물가의 물처럼 움직여요


나무의 한 가지 한 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어요
새들은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가며 날아 앉아요


새들이 날아가도록 허공은 왼쪽을 크게 비워놓았어요


모두가
흐르는 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서쪽 하늘로 가는 돛배처럼


ㅡ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사진들 속 장소는 카셀의 빌헬름스훼헤(Wilhelmshöhe) 산상공원(山上公園)

 

 

......................................................................................................

 

 

 

 

 

채식주의자도 아니면서 식탁은 풀밭을 방불케 하고

문패만 수도원이라고 달지 않았을 뿐 옷입는 꼬락서닌 꺼멓고 긴 원피스에 단화신발까지......

이래선 안 되겠다 싶지만, 고칠 것도 반성할 것도 당최 생각나지 않네.

이쯤되면 건망증이 극에 달했거나 치매의 초기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암튼 난 잘못한 게 없고 최소한 그렇다고 철저히 믿는다. 

다행이지. 이런 바보스런 자각이 없다면 내일 새로 뜨는 해가 덜 찬란할지도 몰라.

 

지난 5월은 살아내기 꽤나 버거웠다.

이제 그 끝에서 새 달의 문을 여는 게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6월이다.

 

  • 노루2019.05.30 17:22 신고

    '새들은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가며 날아 앉아요'
    역지사지, 내 혼잣말 들었는지
    짹짹 짹짹짹 (무슨 뜻이지?)

    답글
    • 숲지기2019.05.30 17:31

      노루님댁 능금나뭇가지를 생각합니다.
      새들도 자주 올 것이고요,
      하늘은 그들이 날도록 허공을 준비했을 것이고요.

  • 파란편지2019.06.01 03:18 신고

    전에는 각기 색다른 시들을 보여주시더니
    이번엔 어떻게 이처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시들일까........
    절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숲지기님네 그 동네를 생각나게 하는......

    답글
    • 숲지기2019.06.02 00:44

      시를 더 읽게 되리라는 계산 하에
      굳이 이런 제목으로 매달 이렇게 올립니다.
      다른 분들이 아닌 우선 저를 위한 것이고요.

      발표되는 모든 창작시들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고요,
      또 여기 올린 시들이 다른 여타 창작시들에 비해 어떻다는 것도 아닙니다.
      서점에서 시집을 구할 처지도 못되면서
      남의 시들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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