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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송년카드 /김명원 겨울을 악물고 있는 수상한 도시가 있다. 빌딩창문들마다 불어오는 잿빛 기침, 실어증으로 입원중인 가로등, 실밥이 풀리는 보도블록, 자동인형처럼 걷는 딱딱한 사람들, 고개 들면, 쑥 자라 있는 어둠의 흉통이 있다. 12월 31일 밤,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 속을 걸으며 주머니 깊숙이에 오른 손을 넣는 순간, 놀라워라 유년의 골목에서 태어난 눈사람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 걸어온다. 나를 다 읽고 있었다는 듯 나를 다 보고 있었다는 듯 강물에 떠내려간 일기장과 조급해진 신발더미와 몇 번의 연애와 소나기를 맞던 결혼식 조화 화환과 사십년 세월이 주름으로 얼룩진 거울과 그리고 엄마, 타다 만 몇 소절 화장터 불길들과 질긴 시詩 한 줌 부스러기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나를 전집의 시선으로 바라본..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 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

꽃물 고치 / 이정록 아파트 일층으로 이사 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 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노처녀다 붕숭아 꼬투리처럼 눈꺼풀 치켜뜨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끝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 만에 꽃물 들였네 두 손을 활짝 흔들어 보인다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 나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막 부화한 팔순의 나비에게 수컷으로 다가가는데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이 봉숭아 꽃 으깨어 목 축이고 있다 아직은 풀어지지도 더 짜지도 마라 광목 실이 매듭으로 묶여 있다 내각리 옛집 / 이영광 내각리에는 늙은 집들 있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 끝나면 불러 모아놓고..

9월 /이기철 무언가 하나만은 남겨놓고 가고 싶어서 구월이 자꾸 머뭇거린다 꿈을 접은 꽃들 사이에서 나비들이 돌아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화사했던 꿈을 어디다 벗어놓을까 꽃들이 제 이름을 빌려 흙에 서명한다 아픈 꿈은 얼마나 긴지 그 꿈 얼마나 여리고 아픈지 아직도 비단벌레 한 마리 풀잎 위에 영문 모르고 잠들어 있다 나뭇잎이 손가락을 펴 벌레의 잠을 덮어주고 있다 잘못 온 게 아닌가 작은 바람이 생각에 잠긴다 급할 것 없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올해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바람에 씻긴 돌들이 깨끗해진다 여름이 재어지지 않는 큰 팔을 내리고 옷이 추울까 봐 나뭇잎을 모아 제 발등을 덮는다 컴퓨터 속의 학교 /권영하 기다리던 개학을 했다 가방 대신 아이디와 비번을 들고 컴퓨터 속으로 등교를 했다 올해는 어떤 ..

웹소통 /최성아 무리에서 멀어지는 걸음을 조율할 때 벗어난 물줄기만큼 흔적 냅다 지운다면 천 갈래 바다로 가는 강의 약속 아니지 온라인 문을 열다 색다른 계단 만날 때 읽고 싶은 댓글 찾아 한쪽만 오르내리면 사방을 두루 감싸는 바람길을 못 보지 화풀이 생각 늪에 빠져드는 날이거든 편 모아 술렁대는 불길 솟는 날이거든 돋보기 클릭 속으로 흐린 눈을 닦는 거다 크레바스에서 /최정희 깊이일까, 높이일까 까마득한 얼음 절벽 막다른 길 위에서 갈 길을 묻는다 균열된 발밑의 바닥 흔들린 생의 지축 내려가야 하는 걸까 올라가야 하는 걸까 실패한 꿈들이 빙벽 속에 갇혀 운다 햇살에 녹아 흐르는 새하얀 빙하 조각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차갑고도 뜨거운 길 꿈꾸는 가슴이 있어 나 지금 살아있다 별빛은 어둠 속에서 돌올하게..

여름 장마 /이병률 미안하다고 구름을 올려다보지 않으리라 좋아, 라고 말하지도 않으리라 그대를 데려다주는 일 그대의 미래를 나누는 일 그 일에만 나를 사용하리라 한 사람이 와서 나는 어렵지만 두 평이라도 어디 땅을 사서 당신의 뿌리를 담가야겠지만 그것으로도 어려우리라 꽃집을 지나면서도 어떻게 살지? 좁은 골목에 앉아서도 어떻게 살지? 요 며칠 혼자 하는 말은 이 말뿐이지만 당신으로 살아가리라 힘주지 않으리라 무엇이 비 되어 내리는지도 무엇으로 저 햇빛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공기만으로도 살아가는 공기란(空氣蘭)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았으니 당신으로 살지는 않으리라 물 없이 흙도 햇빛도 없이 사람 없이 나는 참 공기만으로 살아가리라 ―계간 '시와 표현' 2012년 가을호 칸나가 피는 오..

미래를 추억하는 방법 /이대흠 꽃이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묻고 직업을 묻고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고 꽃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꽃이 사는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꽃을 볼 때마다 바닥을 봅니다 당신의 바닥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입니까 허공에 집을 지어 놓고 바닥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닥이 절망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허공에 바닥을 그려놓은 게 문제입니다 공기의 명랑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꽃향기가 개울을 이룬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바닥에 등꽃이 핀 저녁이었습니다 당신의 발가락은 꽃잎 끝처럼 순했습니다 향기의 또랑이 가슴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연습하지 않아도 우리는 절망을 치러야 합니다 등꽃의 꽃말을 놓고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꼬았습니다 이별을 짓기 위해서는 ..

붉은 욕이 피는 오월 /박미산 꽃들은 여전히 피어 하늘을 날고 있는데 그녀들의 대화는 자꾸 발밑으로 미끄러진다 나는 플라토닉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의심에 가득 찬 너의 눈빛은 끈적끈적하다 나는 바다를 말하고 있는데 큰 파도 소리를 담은 너는 모진 혀를 놀린다 너는 향기 넘치는 프리지어를 보고도 노란 히스테리와 구겨진 비명을 한 묶음 담아 나에게 던진다 어제의 사월을 긴긴 시간 탐문하던 너는 풀 한 포기 키울 수 없는 너의 사랑을 마구 뱉어낸다 사월의 끝을 지나 오월이 온다 시를 모르는 사랑을 모르는 장미가 가시마다 붉은 욕을 주렁주렁 매달고 시와 사랑 사이 미묘한 경계에서 발을 헛딛으며 자신을 찌른다 ㅡ모던포엠 2020, 5월호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권혁웅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계..

올해의 사순절 /마종기 젊었던 날에는 봄 햇살이 더 밝았다. 밝아서 모든 게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아무데나 누었다. 밤이 되어도 초목은 잠들지 않고 우리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작 우리는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해 어디에 누워도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운 곳은 다 변해 버렸다. 이마에 재를 받은 옛 모습의 몸은 모두들 떠난 것을 이제야 눈치 챈다. 왜 세상이 창백하고 추운지를 배운다. 식물도 기억력이 있다는 중얼거림 속에 숨어서 내 독백을 들어주는 이가 언제부터 주위에 있다는 걸 느낀다. 외로울 때는 오히려 더 혼자가 되어 언 땅에 머리 놓고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입 안 가득한 목마름은 무엇인지 목이 마르지 않으면 멀리 볼 수가 없으니 다음 생이 기다리는 것도 볼 수 없으니..

부추전 /유종인 삼월 삼일날 부추전을 부친 건 어느 혁명의 소사(小史)에도 없는 일, 그럼에도 당신은 오후 4시와 5시 사이에 이 심심한 거사를 부쳐내서는 희고 큰 한 접시 우주에 담아 내놓는구려 야생의 풋것들을 대신하듯 아마 비늘의 궁전에서 모든 아랫도리가 칼을 받아 나온 것들이 이렇게 호주산 밀가루에 버무려 거뭇거뭇 탄 데도 훈장처럼 갖추고 나온 것이 오늘 하루 글이 없는 나를 은근한 사람으로 부추기는구려 당신과 마주 앉아 침묵이 더 자주 젓가락질로 전(煎)을 찢어내는 사이, 세상은 그만큼이나 갈라졌던 국경을 붙여 조금씩 너른 나라로 나아갈 일은 없는가 나는 부추전을 찢어 먹으며 홀로 생각하는구려 더 시들기 전에 어떻게든 구워낸 부추전, 더 파장(罷場)에 들기 전에 마음은 선뜻 어떤 연애의 초록을 뜨..